우리는 여행지를 고를 때 늘 가장 좋은 시기를 먼저 찾는다. 꽃이 피는 계절 축제가 열리는 주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때. 하지만 그 ‘가장 좋은 시기’는 과연 누구에게 좋은 시간일까. 여행지에게 좋은 시간일까 아니면 소비하기에 좋은 시간일까. 사람이 몰리는 순간 여행지는 무대가 되고 풍경은 연출이 된다. 반대로 사람들이 빠져나간 지금 이 순간 여행지는 비로소 자기 모습으로 돌아온다. 여행지의 본모습은 성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에 있다.

사람이 빠져야 장소는 자기 얼굴을 되찾는다
성수기의 여행지는 늘 긴장되어 있다. 많은 사람을 받아내기 위해 공간은 기능적으로 움직이고 동선은 효율 위주로 정리된다. 풍경은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고 장소는 소비를 전제로 운영된다. 그 안에서 여행자는 관람객이 된다.
하지만 사람이 줄어들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가게의 불빛은 조금 낮아지고 거리는 느슨해진다. 벤치는 다시 쉼의 자리가 되고 길은 이동 수단이 아니라 풍경이 된다. 이때 장소는 무대가 아니라 생활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여행지는 보여주는 얼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얼굴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본모습이다.
소음이 사라질수록 공간의 성격은 선명해진다
사람이 많을 때는 소음이 공간의 분위기를 덮는다. 어디를 가든 비슷한 소리 비슷한 움직임 비슷한 속도가 반복된다. 그래서 장소의 개성이 흐려진다. 하지만 비수기가 되면 공간은 자기만의 소리를 되찾는다.
바닷가는 파도 소리가 먼저 들리고 골목은 발걸음 소리가 울린다. 바람이 지나가는 방향과 햇빛이 머무는 자리가 또렷해진다. 이때 여행자는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된다. 장소의 성격은 소음이 사라질수록 더 분명해진다.
지금이라는 시간만이 보여주는 장면들
여행지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다. 성수기의 풍경은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지만 비수기의 장면은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다. 텅 빈 해변 흐린 날의 도시 닫힌 가게 앞의 고요한 거리. 이런 장면들은 여행 가이드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기억에는 오래 남는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화려하지 않지만 솔직하다. 꾸미지 않은 상태의 풍경은 장소의 뼈대를 보여준다. 이곳이 어떤 구조로 어떤 리듬으로 살아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여행지의 본모습은 바로 이런 순간에 드러난다.
여행자의 태도가 바뀔 때 여행도 바뀐다
성수기의 여행자는 일정과 목표를 따른다. 무엇을 봐야 하고 어디를 가야 하는지가 우선이다. 하지만 비수기의 여행자는 머문다. 걷다가 멈추고 앉았다가 다시 걷는다. 여행의 목적이 소모가 아니라 체류로 바뀐다.
이 변화는 여행의 질을 완전히 바꾼다. 장소를 정복하는 여행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행이 된다. 이때 여행지는 배경이 아니라 관계의 대상이 된다. 본모습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덜 붐비는 풍경을 본다는 뜻이 아니다. 그 장소와 같은 속도로 숨 쉬어본다는 뜻이다.
여행지의 본모습은 성수기에 숨겨진다. 사람이 많을수록 장소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기대에 맞는 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금처럼 조용한 시간에는 굳이 꾸미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그래서 여행지의 본모습을 보고 싶다면 성수기가 아니라 지금 가야 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고 유명하지 않아도 좋다. 지금의 여행지는 가장 솔직하고 가장 진짜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 만난 장소는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는 이유가 된다.